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라 다카시 (문단 편집) ==== 유년기 ==== [[난부]] 번의 하급 무사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당시 이름은 켄지로(健次郎)였다. 부친은 하라 나오하루(原直治), 모친은 하라 리츠(原リツ). 13살이었던 1870년, 그는 모리오카 번의 작은 학교였던 사쿠진칸(作人館)에 들어가 공부하다 이듬해 12월 도쿄로 상경하여, 유학을 가르치던 스승 나카 미치타카의 사숙에 들어가 공부했지만, 얼마 안 되어 아이즈 번의 번사(藩士)였던 기시 토시오가 운영하는 사숙 고신주쿠(苟新塾)으로 옮긴다. 그러나, 하필이면 그 때 모리오카에 있던 고향집에 도둑이 들어 학비를 충당할 수 없게 되었고, 하라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 때 이름에 불운이 깃들었다고 생각한 것인지 부모님의 권유에 따라 형제 전원이 이름을 바꾸었고, 이 때 하라 역시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인 다카시로 개명했다. 다카시라는 이름은 하라 본인이 [[주자학]]의 입문서라고도 불리는 [[근사록]]에서 따온 이름으로서, '공경하다(敬う)'라는 의미를 이름에 새기자는 본인의 의지가 담겨있다. 이후 숙식을 해결하며 공부할 곳을 찾아 전전하다 프랑스 선교사가 운영하는 식비와 숙박료 모두가 무료인 라틴 학교를 발견하고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공부에 전념하기 시작한다. 학교의 영향이었는지 이듬해인 1873년부터는 가톨릭 신자가 되었으며 다윗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또한 당시 [[요코하마]]에서 활동하고 있던 신부 펠릭스 에브라르의 지도 아래, 한학과 가톨릭 서적을 읽으며 지식을 쌓아 나갔다. 이듬해부터는 그와 함께 포교활동에 참가하여, 1년간 [[니가타]]에 체류하기도 했다. 참고로 나중에 수상이 되면서 일본 최초의 기독교도 수상 및 태평양 전쟁 이전 유일한 기독교도 수상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19살이 된 하라는 신부 에브라르의 곁을 떠나, 다시 고향 [[모리오카]]에 돌아왔다. 운이 좋게도 당시 하라의 집안은 가세를 회복하여 그의 상경을 지원할 여유가 생겼고, 20살이 된 하라는 재차 상경할 계획을 밝힌다. 또한 이 때 하라는 스스로 본인을 호적에서 분리하여 평민으로 독립했다. [* 그 이유로써, 비록 정확한 사실은 아니나, 당시엔 독립해서 새로 분가를 만들면 [[군면제]]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그래서 그는 메이지 시대부터 개시된 징병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고, 덕분에 훗날 그가 출세하여 정계에 입성한 후에도 결코 군부와 엮일 일이 없었다는 주장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